칼라마리의 첫 번째 앨범 [colour of green]에는 주로 멤버들의 십 대, 이십 대 초반 시절의 생각과 감정이 많이 묻어있다.
앨범 자켓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가상의 캐릭터 [엽록소 소녀]로, 초록색 머리칼이 가장 큰 특징이다. 광합성을 위해 누구보다 햇빛을 좋아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록색 머리는 더욱 짙어져 타고난 생각은 깊어진다.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 영원히 우울해야만 하는 숙명을 단적으로 인물화한 것이 엽록소 소녀인 것이다. 이는 작사를 주로 맡고 있는 지수빈이 자신과 어느 정도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늙은 별]의 화자는 이미 자신이 차갑게 굳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자신에게 희망을 갖고 흔들어 주고 깨워 주길 바라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짐짓 그런 간절함은 알 수 없다면서 딱딱하게 굳어 있길 택한다. 정말이지 십대스러운 사고와 감정과 행동이지만, 스무 살이 넘어서도, 직장 생활을 하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리광피우는 자아는 영원히 모두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바보 같고 멍청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으니 너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고 외쳐주는 타인의 따뜻함을 늘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섬]에서 등장한 섬 모티프는 [Jelly Heart]로도 이어진다. [colour of green]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다름아닌 섬일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외딴 섬에 비유하는 것은 대부분의 작사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지수빈의 습관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교양수업 과제로 제출한 [성(城)과 섬(島)]에서는 그 모티프의 근원이 보다 자세하게 다뤄져 있다. 곡 끄트머리 부분에 꼭 있는 힘껏 절규하는 듯한 기타사운드에 가만히 마음을 집중하면, 그 순간만큼은 외딴 섬에 홀로 남겨져 있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들 것이다.
[...나의 외로움은 한때의 것이 아니었으며 평생 끌고 가야 한 숙명이라는 가설에 점점 힘이 실려가는 요즘이다.]
지수빈은 중학생 때부터 생각을 글로 옮겨적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 스무 살 무렵에는 [우리는 너무 닮았네]라는 제목의 시집을 자가출판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는 [colour of green]의 노랫말의 시작점이 된, 다소 정제되지 않은 형태의 원형의 가사를 엿볼 수 있다.
[늙은 별]의 화자가 조금 자란 것이 [Jelly Heart]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대화하고 싶은지 아무도 몰라준다며, 자신에게서 떨어져 달라고 외친다. 자신의 심장[마음]은 젤리처럼 말캉말캉하고 여리고 찢어지기 쉽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쉽게 출입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는, 그야말로 초강력 방어기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십대 시절 꿈꾸었던 환상의 대부분은 이미 죽어 버렸다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 그 누구보다 크게 소리치지만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누군가의 따뜻한 진심을 원한다는 반증이리라.
다소 어두침침한 두 곡과 달리, [고백송]에서는 처음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스무 살의 사고과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있다. 세상은 믿을 게 못 되며, 믿을 사람은 곧 자신뿐이라는 당돌하고 치기 어린 고백에는 속는 셈 치고서라도 한번 넘어가볼까 싶은 매력이 있다.
앨범에서 유일하게 지우형 작사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에 처음 빠진 20대[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자의 성별은 다르지만 당돌함과 절실함이 엿보인다는 점에서는 [고백송]과 그 궤를 같이한다. 가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더욱 순수해지고 당당해질 수 있는 20대 초반의 사랑이라는 주제로 보다 폭넓은 공감을 얻길 바란다.
고백도 끝나고, 시간이 지나며, 사랑도 끝나면 찾아오는 것은 텅 빈 [일요일 아침]이다. 넘쳐흐르는 시간의 공백 속에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그야말로 공허한 휴일, 문 너머로 들려오는 발소리에도 설마하지만 역시나 본인의 손님은 아니다. 그 낭패감과 실망감, 위로가 되는 것은 그저 무심하고 우직하게 흘러가 주는 시간 뿐이다.
[8년의 시간]은 첫 작업부터 곡 완성까지 꼬박 8년이 걸려서 붙여진 제목이다. 물론 8년 동안 곡에만 몰두했다는 것은 아니고, 끝맺음이 오래 걸렸다는 의미이다.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문지기 역할을 하는 곡은 테이프를 되감는 듯한 소리로 시작된다. 음악이라는 형태를 빌려 스스로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한 그 첫 무렵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의식 같은 단계이다. 이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colour of green]의 이야기 속으로 온전히 빠져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부드럽고 투명한 인상의 보컬과는 대조적으로, [colour of green]의 타이틀곡 사운드는 다소 파괴적이고 거칠고 심지어는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불균형성에서 오는 즐거움을 듣는이들이 만끽할 수 있길, 칼라마리는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